안영 장편소설 『영원한 달빛 신사임당』. 이 책은 어려운 집안의 최고 경영자가 되어, 몸에 밴 겸손으로 남편을 다독이며 바른 길로 이끌어 준 아내이자 사람됨을 최우선으로 자녀 교육에 정성을 쏟아 율곡을 구도장원공으로 길러낸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삶을 그려냈다.
▶ “당호라고? 좋은 생각이오. 우리 인선이 그렇게 훌륭한 분을 마음에 모시고 있었다니 대견하구나. 사람은 항상 앞서 간 성현들 중에 자신이 마음으로 존경하며 따르고 싶은 사람 한 분을 모시는 게 중요하지. 그래야 인생의 목표가 서는 것이거든. 사람마다 제게 알맞은 성현들이 있기 마련이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은 천양지차가 된다. 그래서 청년기에 접어들면 제일 먼저 할 일이 입지立志란다. 자기 뜻을 세워 놓으면 자연히 거기 맞추어 노력을 하게 마련이지. 그러다 보면 설령 그분과 똑같이는 못 되어도 그 비슷한 사람은 되지 않겠느냐. 너는 아주 네게 딱 맞는 분을 마음에 모셨구나. 태임을 본받는다, 정말 좋구나. 사임당. 신사임당. 듣기도 좋아. 네가 스무 살이나 되면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3 생명의 소중함에 눈 뜨며’ 중에서)
▶ 여름이 왔다. 봄비에 모종을 한 게 엊그제 같은데 텃밭에는 오이며 가지들이 조랑조랑 열렸다. 사임당은 점심 반찬을 만들려 오이를 따려다가 잠깐 숨을 멈췄다. 아야, 가시가 그네의 손바닥을 찔렀던 것이다. 갑자기 그 가시 달린 오이를 그리고 싶었다. 텃밭에는 보랏빛 가지도 조랑조랑 열려 있고 아직 매지 못한 강아지풀도 함께 있어 그 여러 가지 것들을 함께 따 가지고 들어갔다. 가지는 빛깔도 아름다웠지만 그 탄력 있는 부드러움을 어디에다 견주랴. 그런 가지가 있는가 하면 온몸에 실낱같은 가시를 달고 있는 오이도 있다니 우스웠다. 강아지풀 또한 부드럽고 보송보송했다. 볼에 부비면 간지럽기까지 한 풀이었다. 어떤 풀은 살을 베일 듯이 날카롭고 어떤 풀은 솜털처럼 부드럽다.
신기하기도 하지. 이렇듯 각양각색의 생명이 어떻게 다 생겨났을까. 식물뿐 아니라 땅에 기는 벌레도 각기 다른 제 모습을 지니고 꿈틀꿈틀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임당은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도 허투루 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초충은 언제나 다정한 그의 그림 소재가 되어 주었다. 그네는 그 모든 것들을 화폭에 담았다.
옛 선비들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대개 먹만으로 간결하게 그리고 있었지만 사임당은 주변의 사물들을 꼼꼼하게 있는 그대로 그리고 싶었다. 그네가 변형을 주었다면 단 하나, 식물들의 줄기를 항상 곡선으로 그렸다. 왠지 반듯한 줄기보다는 약간 굽은 곡선이 더 부드럽게 보여 좋았다. 꼭 이름 있는 사람들의 그림을 흉내 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네는 수묵화 대신에 알맞은 빛깔을 칠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어떤 때는 밖으로 나타난 빛깔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눈에 보이는 빛깔로도 그려 보았다. 꽃을 파랗게도 칠해 보고 가지를 하얗게도 칠해 보았다. 가지야말로 쪼개 보면 속은 하얗지 않던가. 그래서 보랏빛 껍질을 벗기고 하얀 속살을 드러내는 심정으로 흰빛을 칠해 보았다. 파란 꽃, 하얀 가지, 그네는 자기만의 독창적 화법을 살리며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끼기도 하였다.
(‘8 남편에게 학업을 권하다’ 중에서)
▶ 매창이 어머니의 체취가 담긴 병풍 수를 정겹게 지긋이 들여다보다가 말한다.
“저는 왠지 달빛만 보면 어머니를 뵌 듯 반가워져요. 초승달도, 그믐달도 어느 달에서나 어머니를 느끼지만 보름달에서 제일 많이 느껴요. 그래서 보름만 되면 으레 문을 열고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지요. 어두운 밤, 허공중에 둥두렷이 떠 있는 보름달은 꼭 어머니 얼굴 같아요. 하늘에 달이야 하나지만 우리 사는 곳곳, 동네마다 골목마다 고루 비춰 주듯, 어머니도 한 분이지만 우리 일곱 남매 사는 곳곳마다 찾아다니며 빛을 선사하시는 것만 같거든요. 그리고 언제나 보름달 바짝 옆에는 별이 하나 따라다니지요. 그게 우리 각자라는 생각이 들어요. 각자 자기 사는 곳에서 어머닐 바라보며 바짝 옆을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여요. 또 조금 떨어진 곳에는 북두칠성이 오순도순 사이좋게 모여서 반짝이고 있지요. 그건 꼭 우리 칠 남매가 모인 자리 같아요. 어머니는 형제간 우애를 끔찍이도 강조하셨거든요.”
(‘14 에필로그’ 중에서)
▶ 새신랑 율곡도 한마디.
“다 같은 사람이라도 잘 살다 간 사람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육신만 없어지지 그와 함께 나누었던 정, 말씀, 모두 남은 가족들의 마음 안에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산 자가 죽지 않는 한, 죽은 자도 살아 있는 자의 가슴에 영원히 남게 되지요. 당사자를 보지 못한 후손들에게도 그분 덕담을 들려주면 그 빛과 향기가 대대로 전해질 것 아닙니까? 결국 어머니처럼 잘 살다 간 사람은 이 세상에 생명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이지요.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이승을 떠나면 저승에서 얼굴을 맞대고 만날 날이 있겠지요.”
(‘14 에필로그’ 중에서)
<2007-04-15 평화신문> 신사임당(1504~51). 시ㆍ서ㆍ화에 두루 뛰어났고 율곡 이이(1536~84)의 어머니로, 조선 사대부 부녀에게 요구되는 덕행과 재능을 겸비했다. 48년 삶을 "아름답게" 살다간 현모양처이자 겨레의 어머니상이다. 그럼에도 그의 한 생애는 단편적 정보만이 고작이다. 있다면, 아들 율곡이 16살에 쓴 「선비행장」이라는 추모문집 한 권이 전부. 마침 2003년 12월 한국소설가협회는 우리나라 역사 인물 102인을 선정해 소설화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 소식을 흘려들었던 소설가 안영(실비아, 67)씨는 이듬해 여름까지도 소설화 대상으로 선택되지 않은 15인 가운데 남아있던 신사임당을 보고 선뜻 소설화하기로 했다. 그 때부터 작가는 서재에 신사임당의 초상을 걸어놓고 아침저녁 문안드리듯 매일같이 그의 삶을 소설화했다. 그 해가 신사임당 탄신 500돌이던 2004년으로, 다음해 1월부터는 교회 월간지 「참 소중한 당신」에 연재를 시작해 올 3월까지 27개월간 그의 삶을 문학적으로 그려냈다. 이 원고가 「그 영원한 달빛, 신사임당」이라는 한 권 책으로 묶여 나왔다. 작가는 신사임당을 학자ㆍ시인ㆍ예술가로만 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넉넉치 못한 살림살이에 친정 덕을 보고 살면서 일곱 남매 옷을 깁고 손질해 입히며 근검절약하고 자녀들을 훈육하는 한 가정의 아내와 어머니라는 데 더 주목한다. 조선시대를 살아간 여인네들의 참모습, 특히 시집살이와 친정살이를 통해 그 속내까지 인간적으로 표현해내려 한다는 점이 이 작품이 주는 미덕이다. 특히나 가정 해체가 심각한 사회 현안으로 대두되는 시대에 행복한 가정생활과 자녀교육을 위한 지침서로도 이 소설은 손색이 전혀 없다. 오세택 기자